해미읍성을 뒤로 하고 해미성지로 이동.


해미성지는 해미읍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참고로 해미성당은 조산교와 남문5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지도는 구글에서 가져왔다.


면사무소 클라스 ㄷㄷㄷ


소규모 해바라기 밭.


작품명 : 고개숙인 남성

해미성지에 도착.


해미순교성지는 1797년(정사박해)부터 1872년까지 박해가 있었던 곳으로
1. 조선시대의 순교자 약1만 명 가운데 충청남도 서북부(내포) 지역의 교우 1천여 명 이상이 순교한 곳이다.
2. 그러나 이곳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름을 모르는 순교자로 남아있으니 그 이유는 당시 해미현은 무관영장이 지역통치를 겸한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조정의 시책과는 무관하게 자유로이 박해를 하면서도 중앙에 보고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이며 이 가운데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세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2014. 8. 16.)
3. 그리고 이곳은 처형 방법이 사약, 몰매, 교수, 참수, 동사와 함께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트려 처형하는 수장형장이었다. (진둠벙)
4. 1935년 프랑스 범(Barraux) 신부에 의해 순교자 유해를 찾게 되었고, 뼈와 치아, 머리카락을 모신 기념관에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마리아' 기도 소리가 구경을 하던 외인들에게는 '여수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숫골'이라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리고 해미지역에는 또한 신앙선조들이 압송되었던 '한티고개성지'와 투옥, 고문, 처형이 있었던 '해미읍성성지(옥터, 호야나무)', 그리고 자리개질 처형이 자행된 '서문밖성지'가 있는 곳으로 연간 10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위 사진은 가로 1000 픽셀로 줄이면 글씨가 안 보여서 예외적으로 2000 픽셀로 올렸다.

뭐야 이거.. 2000 픽셀로 올렸는데 왜 1000 픽셀로 보여...


정문에서 사진을 담고 싶었으나 주차된 차량 때문에 측면에서 한 컷.


이름 없는 집.


한국인 st 성모마리아인가?


이번에 이 지역에서 순교한 세 분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시복기념비.


해미 순교 성지 기념관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사진은 찍지 않았다.


진둠벙.


진둠벙 (죄인둠벙)
팔을 묶어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둠벙 속에 처박혀 죽게 하였다.


따라서 여기는 천주교도들을 수장한 곳이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돌 10여 개에 지쟈쓰의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조각을 해서 묘사했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다.


노천성당.






해미순교탑과 무명순교자의 묘.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이곳 해미 생매장터에서 발굴하여 1935년 4월 2일 서산 상흥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다가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여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원위치에 옮겨 모시다. -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경갑룡 요셉





이 사진을 끝으로 터미널로 돌아가 차편을 확인하고
남는 시간까지 커피숍에서 Iced Americano 한 잔 하면서 부족한 모바일 폰 배터리를 충즈언~

*새 에디터로 작성시 텍스트형 위치태그가 사라져 이것이 고쳐지기 전 까지는 여행관련 포스트는 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새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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