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황금세대인 92학번 가운데서도 빅3라 불리던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그 중 한 명이자 이제는 배우 최진실의 전 남편으로 더 유명한 조성민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정사는 배제하고 야구인로서의 이야기만 적어 본다.
신일고 에이스였던 조성민은 프로입단 대신
고려대에 진학하여 그곳에서도 에이스로 활동하다 졸업 후
신인 최고 대우 수준인 ¥1억 5천만에 무려 8년 계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입단 후 2군에서 삐대다가 1997년 후반기에
마무리 투수의 부상으로 인한 이탈로 땜빵으로 들어섰다가 쾌투를 펼쳤다.
이듬해인 1998년, 선발로 보직을 변경하고 기존 선발 투수진의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인해
5선발 투수의 자리를 꿰어찼고 전반기 15경기에 출전해 7승 6패 방어율 2.75라는 좋은 성적으로 올스타에 뽑혔다.
이 중에는 세 번의 완봉승, 두 번의 완투승, 한 번의 완투패도 포함되어 있다.
야구 인생 내리막의 시작인 1998년 올스타전에서 8회에 등판한 조성민은 이닝을 삼자범퇴로 막았다.
9회에 다시 등판한 그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나서 팔꿈치에 문제가 있어 교체를 요구했으나
당시 센트럴 리그 투수코치를 맡았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権藤博 감독은 계속 등판을 지시했고
결국 스스로 이닝을 마무리 했으나 끊어진 팔꿈치 인대 탓에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곤도 히로시 権藤博 스스로가 무리한 투구로 인해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음에도
자기 팀 마무리 투수인 '大魔神' 사사키 가즈히로 佐々木主浩를 쉬게 하려고 본인에게 더 던지게 한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宝島社, 『巨人軍タブー事件史』내의 인터뷰「憎んで愛したジャイアンツ」에 실려있다고 한다.
1999년은 수술과 재활로 통으로 날리고 2000년 2월, 2군에서 첫 실전 등판에 올랐다.
그 해 5월, 2군에서 5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뒤 열흘 뒤 1군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22개월만에 1군 무대에 오른 조성민은 계투로 등판하다 20일만에 발목 부상으로 다시 2군에 내려갔다.
2군에 있던 중 잠시 서울에 들러 최진실과의 결혼계획을 공식 발표했고
8월에 다시 1군 엔트리에 올라와 26개월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2주만에 스스로 2군행을 자처했고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다시 시즌을 접었다.
2001년, 요미우리는 정민태를 영입하여 조성민, 정민철에 이어
세 번째 한국 선수를 영입했는데 아쉽게도 세 선수 다 성적은 좋지 못했다.
같은 해 조성민은 두 번째 팔꿈치 수술에 들어감에 따라 시즌을 통으로 날리게 되었다.
2002년 5월, 21개월만에 1군에 다시 오른 조성민은 같은 달, 역시 21개월만에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공을 뿌릴 수록 구속 저하가 현저했고 무릎과 팔꿈치 부상을 이유로 다시 2군에 내려갔다.
세 번째 수술을 감행하여 선수 생활을 강행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조성민은 8월에 요미우리 구단에 퇴단을 요청했고, 10월 요미우리 자이언츠 퇴단을 공식 발표했다.
사실상 은퇴였다.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03년에 2004년 신인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해 8월, 퇴단을 선택하지 8개월만에 현역 복귀로 마음을 먹었으나 선택받지 못했다.
2004년에도 2005년 신인 2차지명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역시 선택받지 못했다.
2005년, MBC ESPN의 야구 해설자로 새출발을 했으나
김인식 감독의 부름으로 5월 5일 한화 이글스와 입단 계약했다.
마, 이 이후는 접하기 비교적 쉬우니 후략.
Career stats in NPB, KBO
프로 선수, 코치 시절 등번호
51 (1996 년 - 1997 년)
21 (1998 년 - 2002 년)
99 (2005 년)
1 (2006 년 - 2007 년)
86 (2011 년 - 2012 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중 한 명이자 이제는 배우 최진실의 전 남편으로 더 유명한 조성민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정사는 배제하고 야구인로서의 이야기만 적어 본다.
신일고 에이스였던 조성민은 프로입단 대신
고려대에 진학하여 그곳에서도 에이스로 활동하다 졸업 후
신인 최고 대우 수준인 ¥1억 5천만에 무려 8년 계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입단 후 2군에서 삐대다가 1997년 후반기에
마무리 투수의 부상으로 인한 이탈로 땜빵으로 들어섰다가 쾌투를 펼쳤다.
이듬해인 1998년, 선발로 보직을 변경하고 기존 선발 투수진의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인해
5선발 투수의 자리를 꿰어찼고 전반기 15경기에 출전해 7승 6패 방어율 2.75라는 좋은 성적으로 올스타에 뽑혔다.
이 중에는 세 번의 완봉승, 두 번의 완투승, 한 번의 완투패도 포함되어 있다.
야구 인생 내리막의 시작인 1998년 올스타전에서 8회에 등판한 조성민은 이닝을 삼자범퇴로 막았다.
9회에 다시 등판한 그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나서 팔꿈치에 문제가 있어 교체를 요구했으나
당시 센트럴 리그 투수코치를 맡았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権藤博 감독은 계속 등판을 지시했고
결국 스스로 이닝을 마무리 했으나 끊어진 팔꿈치 인대 탓에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곤도 히로시 権藤博 스스로가 무리한 투구로 인해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음에도
자기 팀 마무리 투수인 '大魔神' 사사키 가즈히로 佐々木主浩를 쉬게 하려고 본인에게 더 던지게 한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宝島社, 『巨人軍タブー事件史』내의 인터뷰「憎んで愛したジャイアンツ」에 실려있다고 한다.
1999년은 수술과 재활로 통으로 날리고 2000년 2월, 2군에서 첫 실전 등판에 올랐다.
그 해 5월, 2군에서 5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뒤 열흘 뒤 1군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22개월만에 1군 무대에 오른 조성민은 계투로 등판하다 20일만에 발목 부상으로 다시 2군에 내려갔다.
2군에 있던 중 잠시 서울에 들러 최진실과의 결혼계획을 공식 발표했고
8월에 다시 1군 엔트리에 올라와 26개월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2주만에 스스로 2군행을 자처했고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다시 시즌을 접었다.
2001년, 요미우리는 정민태를 영입하여 조성민, 정민철에 이어
세 번째 한국 선수를 영입했는데 아쉽게도 세 선수 다 성적은 좋지 못했다.
같은 해 조성민은 두 번째 팔꿈치 수술에 들어감에 따라 시즌을 통으로 날리게 되었다.
2002년 5월, 21개월만에 1군에 다시 오른 조성민은 같은 달, 역시 21개월만에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공을 뿌릴 수록 구속 저하가 현저했고 무릎과 팔꿈치 부상을 이유로 다시 2군에 내려갔다.
세 번째 수술을 감행하여 선수 생활을 강행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조성민은 8월에 요미우리 구단에 퇴단을 요청했고, 10월 요미우리 자이언츠 퇴단을 공식 발표했다.
사실상 은퇴였다.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03년에 2004년 신인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해 8월, 퇴단을 선택하지 8개월만에 현역 복귀로 마음을 먹었으나 선택받지 못했다.
2004년에도 2005년 신인 2차지명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역시 선택받지 못했다.
2005년, MBC ESPN의 야구 해설자로 새출발을 했으나
김인식 감독의 부름으로 5월 5일 한화 이글스와 입단 계약했다.
마, 이 이후는 접하기 비교적 쉬우니 후략.
Career stats in NPB, KBO
연도 Year |
팀 Team |
승 W |
패 L |
평균자책 ERA |
경기 G |
선발 GS |
완투 CG |
완봉 SHO |
세이브 SV |
홀드 HD |
이닝 IP |
피안타 H |
실점 R |
자책점 ER |
피홈런 HR |
사구 HB |
볼넷 BB |
고의사구 IBB |
삼진 SO |
WHIP |
1997 | 巨人 | 1 |
2 | 2.89 | 22 | 0 | 0 | 0 | 11 | - | 28 | 16 | 10 | 9 | 1 | 1 | 13 | 0 | 30 | 1.04 |
1998 | 7 | 6 | 2.75 | 15 | 15 | 6 | 3 | 0 | - | 104.2 | 96 | 36 | 32 | 4 | 4 | 34 | 0 | 83 | 1.24 | |
2000 | 1 | 2 | 3.86 | 10 | 1 | 0 | 0 | 0 | - | 14 | 20 | 9 | 6 | 2 | 0 | 5 | 1 | 9 | 1.79 | |
2002 | 2 | 0 | 2.31 | 6 | 1 | 0 | 0 | 0 | - | 11.2 | 12 | 3 | 3 | 1 | 0 | 2 | 0 | 5 | 1.20 | |
2005 | 한화 이글스 |
2 | 2 | 6.52 | 16 | 0 | 0 | 0 | 0 | 4 | 19.1 | 30 | 15 | 14 | 1 | 6 | 9 | 0 | 8 | 2.02 |
2006 | 0 | 0 | 6.75 | 7 | 0 | 0 | 0 | 0 | 0 | 6.2 | 12 | 6 | 5 | 1 | 0 | 6 | 0 | 4 | 2.70 | |
2007 | 1 | 2 | 4.19 | 12 | 8 | 0 | 0 | 0 | 0 | 43 | 41 | 23 | 20 | 3 | 5 | 19 | 2 | 18 | 1.40 | |
NPB : 4년 | 11 | 10 | 2.84 | 53 | 17 | 6 | 3 | 11 | - | 158.1 | 144 | 58 | 50 | 8 | 5 | 54 | 1 | 127 | 1.25 | |
KBO : 3년 | 3 | 4 | 5.09 | 35 | 8 | 0 | 0 | 0 | 4 | 69 | 83 | 44 | 39 | 5 | 11 | 34 | 2 | 30 | 1.70 |
프로 선수, 코치 시절 등번호
51 (1996 년 - 1997 년)
21 (1998 년 - 2002 년)
99 (2005 년)
1 (2006 년 - 2007 년)
86 (2011 년 - 2012 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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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하였고 상업적인 용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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