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충남의 두 성지 방문을 맞이하여 미리 한 번 가보려고 일정을 짰으나
막상 가려니 귀찮아서 놓친 게 하루, 날씨가 안 도와줘서 포기한 게 하루..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늦추다 보니 이러다 교황께서 먼저 그곳에 갈 것 같아 큰 맘 먹고 출발.
했으나 분명히 전날 일기예보는 남부 지방에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왜 버스에서부터 비가 오는 것이냐.. 당연히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망할 것.
게다가 자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릴 거리를 버스는 오만군데를 다 들러 2시간 57분만에 도착.. 끄어..
안 그래도 비가 와서 솔뫼성지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상을 크게 벗어난 이동 시간으로 인하여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었다.
허기를 달래러 시장에 들어가 뭐 먹을 만한 곳이 있나 찾아봤는데
영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이곳 저곳 거닐다가 우연히 해미읍성 발견-_-
일단은 요기를 해야겠기에 해미읍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다 국밥집을 발견하여 입장.
소머리국밥을 시켰는데 마늘을 많이 넣어 마늘향이 너무 진하게 우러났다.
마늘을 좋아하지 않는 1인이라 마늘향 때문에 다 못 먹었다.
삼계탕 안에 들어있는 마늘만 먹는데 그것도 마늘향이 안 나서 먹는 것이다.
배를 채우고 해미읍성으로 고고싱.
첫 사진은 심신을 치유해줄 꽃 사진으로.
입추가 지나서 그런가 코스모스가 피었다.
무궁무궁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꽃.
민속가옥 1.
조선시대 민가로 부농의 집을 재현.
전형적인 서산지역의 민가로 대청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ㄱ자형의 가옥은 ㅡ자형 가옥의 기본평면에서 발전된 것으로,
부엌 1칸, 방 1칸의 기본적인 생활공간의 형태로 필요에 따라 칸이 덧붙여져 확대된 것.
이 가옥은 부유한 농가로 각종 농기구와 농산물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와 부속채가 딸려 있는데
부속건물을 마당 한쪽에 치우쳐 지어 농경 작업을 위한 마당의 공간 활용을 높였단다.
좌측은 측간과 헛간. 우측은 부뚜막.
에그머니나.
닭장 속에는 수탉이~Cock a doodle doo~ 꼬끼오~
한반도 모양으로 꽃을 심어놓았다.
민속가옥 2.
조선시대 민가로 상인의 집을 재현.
대들보 아래의 방을 일렬로 배치한 홑집, 즉 단일형 가옥으로,
우리나라 서부와 남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조선 후기 민가의 보편적 형태.
이 지역 민가들은 일반적으로 몸채를 ㅡ자형으로 하고 광, 외양간, 측간 등을 하나로 묶어 부속채를 구성한단다.
이 가옥 역시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3칸 초가이며 부속채가 딸려있다.
장사가 주업이지만 텃밭 경작을 위한 기본적인 농기구를 갖추었다.
헛간.
민속가옥 3.
조선시대 민가로 말단관리인 서리의집.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서산지역의 3칸 초가집.
ㅡ자형의 평면구성은 우리나라 농촌민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 되는 공간배치로
부엌과 방들이 일렬로 연속 배치되어 있다.
모든 방이 남쪽으로 출입구를 두어 쾌적한 생활공간이 되도록 하고 있다.
방에 갖춘 간단한 문구류가 집주인의 직업을 말해준다.
세 곳 다 방 안에 레알 사람들이 있어서 방안 사진은 찍지 않았다.
제일 위에 민속가옥 1 사진 찍을 때 방 안에 할머니 계신 거 보고 깜놀.
이거 토란잎인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 동네에 저게 있어서 갑자기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순교기념비.
올 16일에 광화문에서 시복될 3인의 복자.
좌측 갓을 쓴 동상은 복자 김진후 비오,
우측 정자관을 쓴 동상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우측 무릎꿇고 있는 동상은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설명.
교황 맞이로 분주하여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너저분한 주변.
복자상 옆에 있는 옥사로 입장.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란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단다.
감옥같이 만들어 놨는데 교도관 집무실인 듯.
남자들 감옥.
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지역민들에게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단다.
1790~180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되고 있단다.
동헌으로 ㄱㄱㅅ.
좌측 나무에 관한 설명도 사진을 남겼는데 글씨 부분이 하얗게 담기면서 결국 정보가 없ㅋ엉ㅋ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란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현감은 시장 정도 되려나? 영장은 그 진영의 장이고 토포사는 도적잡을 목적으로 주던 벼슬이고 보통 진영장이 겸직.
동헌부속사.
조선시대 관아건물 배치로 보아 고자실(庫子室)로 추정되는 건물로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를 고자라 하였으며 고자실은 이들이 근무하던 곳.
책실.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 또는 책사라고도 한다.
동헌 서쪽에 내아가 있어 한 컷.
내아란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동헌 우측으로 나오니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 옆에 이건 뭣이여? 돌탑들이 나란히 있다.
언덕 위로 오르니 장승과 정자, 청허정이 있었다.
청허정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성종 22년(1491)에 세운 정자란다.
지금 모습은 과거 기록을 근거로 2011년에 개축한 모습이고 정자 안에 사람이 있어 가까이선 찍지 않았다.
1872년 고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그 전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신사를 만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하.. 왜놈들..
좀 전에 올라온 계단이 신사를 건립하며 정상부로 향하는 진입로로 만든 계단이란다.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천수만이 보인다는데 이 날은 흐리니 개코나~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
장승동상.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수령 100~200년 이상의 소나무가 피해를 입어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해미읍성과 역사를 함께한 소나무를 의미있게 활용하고자 장승동산을 계획하게 되었단다.
제작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장승들은 대통령의 근엄한 이미지를 탈피하여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만들었고,
그 당시 국정지표를 장승에 새겨 역사자료로 활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단다.
뒤편엔 솔숲이 있어 산책하기 좋을 듯 싶다.
청설모가 보여 한 컷. 사진 중앙을 잘 보면 보인다.
배배꼬인 소나무.
힘들게 왜 구부렸니.
성벽쪽으로 올라가 성벽을 따라 이동하는 길에 나타난 해자.
잘 자라다 갑자기 요란하게 뻗은 소나무.
솔숲을 벗어나 다시 읍성 중앙부로 이동했다.
이곳에선 교황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메인 게이트인 진남문을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황명 홍치 사년 신해 조 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
황제의 국가인 명나라 홍치 4년, 신해년에 지음.
는 성종 22년, 서기 1491년.
진남문 위에서 찍은 읍성 안의 모습.
밖을 나서며 마지막 한 컷.
*위키피디아는 성을 castle로 썼지만 한국관광공사에선 fortress로 써서 한국관광공사의 영어표현을 따라 씀.
**새 에디터로 작성시 텍스트형 위치태그가 사라져 이것이 고쳐지기 전 까지는 여행관련 포스트는 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새로 올림.
막상 가려니 귀찮아서 놓친 게 하루, 날씨가 안 도와줘서 포기한 게 하루..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늦추다 보니 이러다 교황께서 먼저 그곳에 갈 것 같아 큰 맘 먹고 출발.
했으나 분명히 전날 일기예보는 남부 지방에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왜 버스에서부터 비가 오는 것이냐.. 당연히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망할 것.
게다가 자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릴 거리를 버스는 오만군데를 다 들러 2시간 57분만에 도착.. 끄어..
안 그래도 비가 와서 솔뫼성지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상을 크게 벗어난 이동 시간으로 인하여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었다.
허기를 달래러 시장에 들어가 뭐 먹을 만한 곳이 있나 찾아봤는데
영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이곳 저곳 거닐다가 우연히 해미읍성 발견-_-
일단은 요기를 해야겠기에 해미읍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다 국밥집을 발견하여 입장.
소머리국밥을 시켰는데 마늘을 많이 넣어 마늘향이 너무 진하게 우러났다.
마늘을 좋아하지 않는 1인이라 마늘향 때문에 다 못 먹었다.
삼계탕 안에 들어있는 마늘만 먹는데 그것도 마늘향이 안 나서 먹는 것이다.
배를 채우고 해미읍성으로 고고싱.
첫 사진은 심신을 치유해줄 꽃 사진으로.
입추가 지나서 그런가 코스모스가 피었다.
무궁무궁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꽃.
민속가옥 1.
조선시대 민가로 부농의 집을 재현.
전형적인 서산지역의 민가로 대청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ㄱ자형의 가옥은 ㅡ자형 가옥의 기본평면에서 발전된 것으로,
부엌 1칸, 방 1칸의 기본적인 생활공간의 형태로 필요에 따라 칸이 덧붙여져 확대된 것.
이 가옥은 부유한 농가로 각종 농기구와 농산물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와 부속채가 딸려 있는데
부속건물을 마당 한쪽에 치우쳐 지어 농경 작업을 위한 마당의 공간 활용을 높였단다.
좌측은 측간과 헛간. 우측은 부뚜막.
에그머니나.
닭장 속에는 수탉이~
한반도 모양으로 꽃을 심어놓았다.
민속가옥 2.
조선시대 민가로 상인의 집을 재현.
대들보 아래의 방을 일렬로 배치한 홑집, 즉 단일형 가옥으로,
우리나라 서부와 남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조선 후기 민가의 보편적 형태.
이 지역 민가들은 일반적으로 몸채를 ㅡ자형으로 하고 광, 외양간, 측간 등을 하나로 묶어 부속채를 구성한단다.
이 가옥 역시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3칸 초가이며 부속채가 딸려있다.
장사가 주업이지만 텃밭 경작을 위한 기본적인 농기구를 갖추었다.
헛간.
민속가옥 3.
조선시대 민가로 말단관리인 서리의집.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서산지역의 3칸 초가집.
ㅡ자형의 평면구성은 우리나라 농촌민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 되는 공간배치로
부엌과 방들이 일렬로 연속 배치되어 있다.
모든 방이 남쪽으로 출입구를 두어 쾌적한 생활공간이 되도록 하고 있다.
방에 갖춘 간단한 문구류가 집주인의 직업을 말해준다.
세 곳 다 방 안에 레알 사람들이 있어서 방안 사진은 찍지 않았다.
제일 위에 민속가옥 1 사진 찍을 때 방 안에 할머니 계신 거 보고 깜놀.
이거 토란잎인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 동네에 저게 있어서 갑자기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순교기념비.
올 16일에 광화문에서 시복될 3인의 복자.
좌측 갓을 쓴 동상은 복자 김진후 비오,
우측 정자관을 쓴 동상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우측 무릎꿇고 있는 동상은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설명.
교황 맞이로 분주하여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너저분한 주변.
복자상 옆에 있는 옥사로 입장.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란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단다.
감옥같이 만들어 놨는데 교도관 집무실인 듯.
남자들 감옥.
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지역민들에게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단다.
1790~180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되고 있단다.
동헌으로 ㄱㄱㅅ.
좌측 나무에 관한 설명도 사진을 남겼는데 글씨 부분이 하얗게 담기면서 결국 정보가 없ㅋ엉ㅋ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란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현감은 시장 정도 되려나? 영장은 그 진영의 장이고 토포사는 도적잡을 목적으로 주던 벼슬이고 보통 진영장이 겸직.
동헌부속사.
조선시대 관아건물 배치로 보아 고자실(庫子室)로 추정되는 건물로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를 고자라 하였으며 고자실은 이들이 근무하던 곳.
책실.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 또는 책사라고도 한다.
동헌 서쪽에 내아가 있어 한 컷.
내아란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동헌 우측으로 나오니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 옆에 이건 뭣이여? 돌탑들이 나란히 있다.
언덕 위로 오르니 장승과 정자, 청허정이 있었다.
청허정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성종 22년(1491)에 세운 정자란다.
지금 모습은 과거 기록을 근거로 2011년에 개축한 모습이고 정자 안에 사람이 있어 가까이선 찍지 않았다.
1872년 고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그 전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신사를 만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하.. 왜놈들..
좀 전에 올라온 계단이 신사를 건립하며 정상부로 향하는 진입로로 만든 계단이란다.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천수만이 보인다는데 이 날은 흐리니 개코나~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
장승동상.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수령 100~200년 이상의 소나무가 피해를 입어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해미읍성과 역사를 함께한 소나무를 의미있게 활용하고자 장승동산을 계획하게 되었단다.
제작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장승들은 대통령의 근엄한 이미지를 탈피하여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만들었고,
그 당시 국정지표를 장승에 새겨 역사자료로 활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단다.
뒤편엔 솔숲이 있어 산책하기 좋을 듯 싶다.
청설모가 보여 한 컷. 사진 중앙을 잘 보면 보인다.
배배꼬인 소나무.
힘들게 왜 구부렸니.
성벽쪽으로 올라가 성벽을 따라 이동하는 길에 나타난 해자.
잘 자라다 갑자기 요란하게 뻗은 소나무.
솔숲을 벗어나 다시 읍성 중앙부로 이동했다.
이곳에선 교황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메인 게이트인 진남문을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황명 홍치 사년 신해 조 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
황제의 국가인 명나라 홍치 4년, 신해년에 지음.
는 성종 22년, 서기 1491년.
진남문 위에서 찍은 읍성 안의 모습.
밖을 나서며 마지막 한 컷.
*위키피디아는 성을 castle로 썼지만 한국관광공사에선 fortress로 써서 한국관광공사의 영어표현을 따라 씀.
**새 에디터로 작성시 텍스트형 위치태그가 사라져 이것이 고쳐지기 전 까지는 여행관련 포스트는 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새로 올림.